2006 교통사고를 당했다.
2007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2008 대학으로 돌아갔다.
2009 제적당했다.
2010 주유소 알바로 연명했다.
2011 공무원이 되었다.
2012 그리고 지금...
엄마에게 의사가 선언했다. "얘는 이제 눈뜨지 못합니다. 돌아가셔서 맘 추스리세요." 엄마는 수긍하지 않았고, 보름 후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간병사曰 "이렇게 빨리 회복되는 환자는 30년전에 딱 한명 봤고, 네가 두번째다." 경추(목뼈)가 부러져서 철심을 박은 거라든지 수술한 열이 머리에 몰려서 쌩쇼를 벌인 거라든지 그런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퇴원 하루 전날, 의사와의 최후면담에서 지랄발광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억은 없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그건 정신병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단다. 마치 술에 취한 듯 필름이 끊겨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쨋든 그 지랄발광 덕분에 정신병원에 감금되었고, 수많은 사건사고 끝에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으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절대적인 무리였다.
뜬금없고... 낯뜨거운 얘기인데... 사고 전의 난 비범했다. 한 번 들은 이야기, 한 번 읽은 이야기, 한 번 떠올린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을 굳이 애쓰지 않아도 거의 완벽하게 기억했다. 덕분에 고3 수험생 때, 등교거부로 학교에 갔던 날짜를 손꼽을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대학교에 전액장학금으로 합격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랬던 나에게 교통사고는 2년이라는 시간만 앗아간게 아니었다. 물리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뇌손상으로 지금도 대뇌를 CT촬영 해보면 새하얗게 나오는 중앙부분. 꽤 많은 조직이 괴사했고, 수많은 기억들이 날아갔다. 지금도 벌레먹은 것처럼 군데군데 사라진 기억에 위화감을 느끼고는 한다. 살아가는데 필수, 본능적인 기능들은 무사했지만, 기본적인 뇌기능, 특히 새로운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저질'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퇴화했다. 대학으로 돌아갔던 당시에는 그런 부분들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다. 그래서 사고 이전처럼 대학생활을 보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성적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미있고 재미없다의 문제도 아니다. 적응하냐 떠도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과거의 내 컨디션은 강 강 강 강 강 의 연속이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또 모든 일들에 꽤 좋은 결과를 얻었다. 비유하자면 24시간 100% 로 가동하는 CPU? 스트레스는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놨다가 가끔 빵! 빵! 터뜨려서 해결했다. 거기에 익숙했고, 능숙했고, 탁월했다. 사고후, 지금의 내 컨디션은 중 중약 약 중 중약 약 이다. 예전에 아무 생각없이 처리했던 일상이 이제는 버겁다. 멀티태스킹 (한번에 2~3가지의 일을 동시에 처리) 에 능했던 과거의 모습은 이제 환상에 불과하다. 조금씩 가속해서 70% 정도까지 끌어올려도 자그마한 스트레스에 좌절 10% 미만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더군다나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머리속에서 모든 정보는 그냥 물흐르듯이 사라져버린다. 기본적인 성능이 떨어진 것 뿐만이 아니라 학생에게는 치명적인'건망증'이 생겼다.
처음에 자각하고 난 절망했다.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더 이상 공과대학에서 버틸 수 없었다. 잠시 쉬고자 휴학계를 내려했지만, 1년간 입원, 퇴원을 반복하던 내 학적이 질병 휴학이 아니라 일반 휴학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휴학을 신청할 수 없었다. 당장 멈출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던 나에게 다가온 결말은 제적이라는 최후통보였다. 히키코모리 생활이 이어졌다.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3~4시간의 주유소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그게 최선이었다. 살아가는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끝조차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시간이 흘렀고,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얼마전 지인의 소개로 마음 편한 곳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생이란게 항상 계획한데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는 사실을 몸소 교훈으로 보여준 것 같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아득한 꿈을 향해서 치열하게 달려왔던 과거의 내 모습이 커다란 돌덩이를 쉽게 옮겨와서 멋진 탑을 쌓는 것과 같았다면, 이제 커다란 돌맹이는 깨알같은 모레, 멋진 탑은 고작 작은 동산으로 변한게 아닐까? 그래도 하루하루 정진하면 무언가 변하는게 있겠지... 이런 삶의 태도는 너무 안이한 것일까? 비범하면서도 평범을 가장했던 나, 평범하고 싶지만 너무나도 특별한 경험을 한 나, 그런 나에게 앞으로 또 무슨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몸으로 얻은 교훈이다. 삶이란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손님과 같다. 그 손님이 得[득]이 될지 害[해]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인생은 아찔하고 유쾌한 것이겠지.
2007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2008 대학으로 돌아갔다.
2009 제적당했다.
2010 주유소 알바로 연명했다.
2011 공무원이 되었다.
2012 그리고 지금...
엄마에게 의사가 선언했다. "얘는 이제 눈뜨지 못합니다. 돌아가셔서 맘 추스리세요." 엄마는 수긍하지 않았고, 보름 후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간병사曰 "이렇게 빨리 회복되는 환자는 30년전에 딱 한명 봤고, 네가 두번째다." 경추(목뼈)가 부러져서 철심을 박은 거라든지 수술한 열이 머리에 몰려서 쌩쇼를 벌인 거라든지 그런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퇴원 하루 전날, 의사와의 최후면담에서 지랄발광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억은 없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그건 정신병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단다. 마치 술에 취한 듯 필름이 끊겨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쨋든 그 지랄발광 덕분에 정신병원에 감금되었고, 수많은 사건사고 끝에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으로 돌아갔다.
출처: 내 머릿속의 지우개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절대적인 무리였다.
뜬금없고... 낯뜨거운 얘기인데... 사고 전의 난 비범했다. 한 번 들은 이야기, 한 번 읽은 이야기, 한 번 떠올린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을 굳이 애쓰지 않아도 거의 완벽하게 기억했다. 덕분에 고3 수험생 때, 등교거부로 학교에 갔던 날짜를 손꼽을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대학교에 전액장학금으로 합격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랬던 나에게 교통사고는 2년이라는 시간만 앗아간게 아니었다. 물리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뇌손상으로 지금도 대뇌를 CT촬영 해보면 새하얗게 나오는 중앙부분. 꽤 많은 조직이 괴사했고, 수많은 기억들이 날아갔다. 지금도 벌레먹은 것처럼 군데군데 사라진 기억에 위화감을 느끼고는 한다. 살아가는데 필수, 본능적인 기능들은 무사했지만, 기본적인 뇌기능, 특히 새로운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저질'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퇴화했다. 대학으로 돌아갔던 당시에는 그런 부분들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다. 그래서 사고 이전처럼 대학생활을 보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성적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미있고 재미없다의 문제도 아니다. 적응하냐 떠도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과거의 내 컨디션은 강 강 강 강 강 의 연속이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또 모든 일들에 꽤 좋은 결과를 얻었다. 비유하자면 24시간 100% 로 가동하는 CPU? 스트레스는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놨다가 가끔 빵! 빵! 터뜨려서 해결했다. 거기에 익숙했고, 능숙했고, 탁월했다. 사고후, 지금의 내 컨디션은 중 중약 약 중 중약 약 이다. 예전에 아무 생각없이 처리했던 일상이 이제는 버겁다. 멀티태스킹 (한번에 2~3가지의 일을 동시에 처리) 에 능했던 과거의 모습은 이제 환상에 불과하다. 조금씩 가속해서 70% 정도까지 끌어올려도 자그마한 스트레스에 좌절 10% 미만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더군다나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머리속에서 모든 정보는 그냥 물흐르듯이 사라져버린다. 기본적인 성능이 떨어진 것 뿐만이 아니라 학생에게는 치명적인'건망증'이 생겼다.
처음에 자각하고 난 절망했다.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더 이상 공과대학에서 버틸 수 없었다. 잠시 쉬고자 휴학계를 내려했지만, 1년간 입원, 퇴원을 반복하던 내 학적이 질병 휴학이 아니라 일반 휴학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휴학을 신청할 수 없었다. 당장 멈출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던 나에게 다가온 결말은 제적이라는 최후통보였다. 히키코모리 생활이 이어졌다.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3~4시간의 주유소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그게 최선이었다. 살아가는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끝조차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시간이 흘렀고,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얼마전 지인의 소개로 마음 편한 곳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생이란게 항상 계획한데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는 사실을 몸소 교훈으로 보여준 것 같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아득한 꿈을 향해서 치열하게 달려왔던 과거의 내 모습이 커다란 돌덩이를 쉽게 옮겨와서 멋진 탑을 쌓는 것과 같았다면, 이제 커다란 돌맹이는 깨알같은 모레, 멋진 탑은 고작 작은 동산으로 변한게 아닐까? 그래도 하루하루 정진하면 무언가 변하는게 있겠지... 이런 삶의 태도는 너무 안이한 것일까? 비범하면서도 평범을 가장했던 나, 평범하고 싶지만 너무나도 특별한 경험을 한 나, 그런 나에게 앞으로 또 무슨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몸으로 얻은 교훈이다. 삶이란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손님과 같다. 그 손님이 得[득]이 될지 害[해]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인생은 아찔하고 유쾌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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