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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가 된 알고리즘 - 인공지능, 예술을 계산할 수 있을까?     

이재박 (지은이) | MiD(엠아이디) | 2018-10-15



들어가는 글 - 인간, 창의를 기계에게 위임하다


제1장. 인공창의까지 138억 년

창의하는 물질 인간

빅뱅에서 다빈치까지

형식의 세계에 의미를 칠해버린 인간

창의에는 있고 진화에는 없는 것

지능과 창의는 어떻게 다를까

진화적 뇌의 한계를 넘어서다


제2장. 인간창의란 무엇인가

신은 창조하고 인간은 창의한다

끝없는 재조합: 갈라져 나오거나 합쳐지거나

기억은 물질로 확장한다

적응하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다

예측하는 인간, 호모 프리디쿠스

학습이 예측을 낳는다

양이 질을 만든다

경쟁: 너무나도 효울적인 창의 플랫폼

네트워크와 창의: 찍고 잇고 오가고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보편성이 부르는 다양성의 노래

진화적 창의에 방향성은 없다

진화적 창의에 우열은 없다

우연인가 논리인가

정확한 것이 창의적인 것이다

창의는 잡종: 순수혈통은 없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다

아이들은 창의적일 수 있을까 

[220p] 어린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어른이 될수록 창의성을 잃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풍부하긴 쉽지 않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기억된 정보가 많아야 하는데 아이들은 아직 많은 것을 기억할만큼 충분한 경험을 싸히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엉뚱한 것입니다. 엉뚱한 것을 상상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 스스로 그 엉뚱함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창의적이라기보다 훌륭한 복사기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창의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거것도 편견입니다.    아이들이 창의적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학습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창의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통되게 말하는 것은 '충분한 학습량'입니다. 어떤 것에 정통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물론 이견도 있습니다만 약 1만 시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약 10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한 분야의 지식만 갖고서는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두 가지 분야 이상에서 충분한 학습량을 축적하고, 양쪽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서로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최소 2만 시간, 대략 20년을 필요로 합니다.


제3장. 인공창의와 예술

예술도 미분할 수 있을까

예술도 예측할 수 있을까

컴퓨터로 들어간 진화 알고리즘

인간의 감정을 배우는 기계

기계와 인간이 같을 필요는 없다

튜링테스트가 말하는 것들

컴퓨터가 창의성을 평가할 수 있을까

알고리즘은 다빈치가 될 수 있을까


제4장. 인간은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한가함의 철학이 절실하다

[288p] 인간은 이제 시간과의 전쟁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적은 이념이 다른 국가 또는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엄청나게 남아돌게 될 시간입니다.    시간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남아돌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기계들 때문이고, 둘째는 인간의 수명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명이 늘어나는 동시에 나 대신 일을 더 잘 처리하는 기계들이 도처에 넘쳐남으로써 인간은 긴 '자유 시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이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난 시대의 가치관입니다. 인류에게 '성실성'은 금과옥조였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스케쥴 관리의 신화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쪼개어 써도, 알무리 성식하게 일을 해도, 잠도 자지 않고 지치지도 않는 기계와의 성실성 경쟁에서 인간이 존재감을 발휘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인공창의 시대에 '성실성'을 인간의 가치로 삼았다가는 우리 모두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굉장한 역설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성실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폐기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노동의 종말까지는 아닐지언정 시대가 노동의 극소화로 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의 철학, 게으른 자의 철학, 한가함의 철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우리는 아주 세련된 방법으로 성실성이라는 가치와 이별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창의력을 총 동원해서 새로운 시대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기계가 우리의 일을 대신 해 준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일 또는 새로운 철학을 만드는 일을 대신 해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생존에 이득을 취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해서 기계가 생존에 위협을 받는 일 같은 것은 벌어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의미 없는 삶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을 인간만이 할 수 있어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적당한 의미를 찾아낼 때 비로소 생존에 성공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위한 새시대의 철학을 만들어 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일하지 않는 것, 게으른 것, 한가한 것을 부정적인 의미에 연결시켜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오래된 연결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야합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긍정적인 의미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중 절대 다수가 낙오자로 전락하는 것을 방관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문제를 푸는 해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인간의 일을 위임하지 않으면 됩니다. 성실하게 살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강제하면 됩니다. 기계에게도, 노예에게도, 가축에게도, 국가에게도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존을 직접 책임지면 됩니다. 그런다면 인간은 오히려 시간 부족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미 위임을 통해 편안해지기를 강력하게 원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 앞에 인공지능, 생명공학, 로봇공학 등의 발달은 위임의 극대화를 제시하고 있지요. '싱귤래러티singularity'라고 일컬어지는 특이점은, '모든 기계에게 위임하는 순간'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기계에게 위임할 수 있어서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면 우리의 본성은 그 길을 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만 그런 시대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한가함의 철학이 부재하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이런 시대에 도달한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따질만큼 우리들은 순진하지 않습니다. 디스토피아도 유토피아도 모두 가상이라는 것을 이미 앞선 논의를 통해 확인햇습니다. 다만 그 가상이 우리의 현실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에, 즉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기에, 우리는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새시대의 가상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왕 의미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샅샅이 살펴서 따지고 검증하는 과학적인 종, 호모 사이언티피쿠스HomoScientificus로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문답함으로써 새시대의 철학을 발명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한가하게 된 과정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둘째, 우리가 한가하게 된 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셋째, 인간이 한가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의 충분한 사례가 존재하는가? 넷째, 인간이 기계와의 비교에서 자존 감을 찾을 수 있으려면 인간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다섯째, 인간과 기계, 더 나아가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 종과 공존할 수 있는 새시대의 철학과 윤리는 무엇인가? 

[295p] 우리들은 구글의 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 아니라 구글의 인공지능을 개발한 개발자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입니다.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진 것이 아니라 알파고를 개발한 하사비스와 개발진에게 진 것입니다. 이세돌과 전통 바둑계는 인간창의에 안주했고 하사비스와 구글의 연구질들은 인공창의에 올라탔습니다.    기계에 의한 인간 지배같은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글의 인공지능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구글의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新)독점입니다. 인공지능은 '의식없는 계산천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착취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인간의 도구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을 가진 기계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이 구도가 유지될 것입니다.

[296p] 돈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일까?    일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지금과 같은 산업구도에서 보면 엄청난 재앙입니다. 소비자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산업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그들을 소비자로 다시 불러들여 생산비를 회수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만일 인공지능과 로봇 때문에 노동자의 숫자가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계와의 경쟁에서 밀려서 임금마저 삭감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구매력을 갖춘 노동자의 숫자는 급감할 것이고, 결국 소비자 부족으로 시장은 붕괴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공급 쪽에서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날 상품의 가치는 여러가지 요소들의 결합으로 구성되는데 인건비, 원자재비, 관리비, 유통비, 마케팅비 등이 핵심요소입니다. 앞으로 이 중 대부분의 항목에서 굉장한 비용절감이 일어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상품의 생산단가도 크게 낮아질 것입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지금보다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상품의 단가도 같이 낮아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를 상쇄시킬 것입니다.    우선 인건비가 대부분의 항목을 차지하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음악에 대한 작곡료나 그림에 대한 작품비는 거의 100% 인건비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만일 인공지능이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린다면 얼마만큼의 비용이 발생할까요? 딱 전기세만큼의 비용이 발생합니다. 비용이 거의 제로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유통시켜 보겠습니다. 인공지능에 의해 디지털로 제작되는 콘텐츠의 유통과정은 자동화될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콘텐츠는 기업의 서버에 모였다가 멜론이나 유튜브와 같은 유통페이지에 노출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 담당자가 노출될 콘텐츠를 선별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알고리즘이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콘텐츠의 제작에서 유통까지 전기세만 지불하고 완료할 수 있습니다. 인간 '셀러브리티'가 중요한 분야에서는 여전히 스타파워를 행사하는 '인간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야들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300p] 인공지능을 구동시키는 데 드는 핵심비용이 전력인데, 태양열 등의 재생에너지를 통해 전력을 생산하는 비용이 거의 제로가 된다면 결국 인공지능 구동비는 제로에 가까울 것이고, 인공지능을 통해 생산되는 상품 가격 역시도 제로에 근접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인공창의 시대, 소비자로서의 우리는 예전만큼의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가난한 소비자가 되겠지만 상품가격이 제로에 수렴함으로써 그 부족분을 상쇄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제학자들에게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지에 대해 재차 확인해야겠지만, 어쨋든 우리 삶에서 돈의 가치가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서 얘기할 순 없지만 경제의 패러다임이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망은 창의를 가속시키는 원인 중 하나였고 인류는 돈을 열렬히 사람했습니다. 인공창의 시대, 돈과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될까요? 정말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입니다. 


인간의 선택은 인간에게 득이 될까

생명은 예술의 재료가 될 것인가


나가는 글

감사의 글

Bibliography

End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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