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goo.gl/81rscJ

한국 교회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 십일조를 가르치며 지켜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 근거는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되어 있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바르게 잘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적으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미국의 교회와는 달리 유럽의 교회는 십일조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고 십일조를 신자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십일조를 하는 쪽과 하지 않는 쪽의 주장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양자 중의 한쪽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주장이 성경적으로 정당한지를 검증하여야 한다.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아브라함이 한 십일조와 율법의 십일조이다.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율법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보다 더 진전된 것이다. 더 진전된 계시의 내용을 정당하게 살피면 그 이전의 계시의 내용은 포함되어 있다. 율법의 십일조는 땅을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 등의 가난한 지체들의 생활을 위하여 요구되었다.

율법에서의 십일조는 의무였고 그 의무를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부어주셨다. 율법 시대에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지키면 부강하게 되고 다른 이웃 나라들을 통치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게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용하셔서 언약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에 제시된 약속을 그의 백성들이 신뢰하도록 하셨다. 반면에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저주를 받는다.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에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뒤따르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와 함께 제시된 물질적인 부유함의 복이나 심판 선언은 모두 문자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문맥 등을 제시하면서 십일조를 통한 물질적인 축복(말 3:8-12)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십일조를 언급하셨다(마 23:23).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고 책망하신다. 예수님은 율법의 십일조를 하면서 더 중요한 요소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문맥과 문법은 그렇게 말할 여지가 없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셨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다만 누구에게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다.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율법의 한 조항인 십일조의 의무가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조항을 그 조항에 담긴 정신과 함께 실천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라기의 십일조 강조와 동일한 맥락이다.

중요한 점은 “율법의 십일조가 오늘날의 교회에게 유효한가?”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중요한 점은 십자가에서 이다. 십자가 이전과 이후는 극명하게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그의 몸된 교회에게 부어주셨다. 옛 언약의 백성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한정적으로 허용되었다. 율법이 중심인 옛 언약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일정 기간 동안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소유하고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누리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식일도 지켰다.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심이었다.(행 21:20). 주후 70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고 돌 성전은 완전히 파괴하시기까지 그들은 율법과 복음 안에 함께 거하였다. 당연히 그들은 십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땅을 경작하여 소출을 얻는 사람들은 율법의 십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언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이방인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경우에는 율법 준수가 아예 요구되지 않았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이라면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는 천사라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하였다(갈 1:8). 바울 사도는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담이었는데, 예수님께서 폐하셨다고 말하였다(엡 2:15).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옛 언약이 완전히 파기되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었다.

히브리서의 내용은 옛 언약의 완전한 파기를 앞두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새 언약의 우월성을 밝히고 더 이상 옛 언약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옛 언약을 폐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율법이 포함된다. 율법의 어떤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율법이 포함된다. 율법은 옛 언약의 중심적인 것으로서 옛 언약이 폐하여지면 당연히 폐하여진다.

십일조는 율법의 한 조항이다. 율법에서 아주 특별한 조항이 아니다. 다른 모든 조항과 다르지 않은 한 조항일 뿐이다. 율법이 폐해질 때에 십일조도 폐해졌다. 십일조만 예외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십일조 제정의 목적을 살피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십일조는 돌 성전 시대에 하나님께서 돌 성전과 관련하여 명하신 율법이다. 십일조의 또 다른 용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십일조는 돌 성전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돌 성전이 파괴됨은 그것에서 사역하던 레위인이 사라지고 그와 연관된 율법 조항들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구분하고 도덕법은 오늘날 유효하고 나머지는 폐하여졌다는 개혁주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에도 십일조는 오늘날 유효하지 않다. 십일조는 도덕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의 십일조는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에 언급되고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강조하셨다(마 23:23, 눅 11:42). 율법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의 시대를 여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현재적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그 율법을 준행하셨다. 십일조 준수는 그 한 내용이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공생애 이전에는 십일조를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셔서 율법에 있어서도 흠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강조하심에 있어서 문맥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는 상황이다.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들이 율법의 십일조를 한다고 자랑스러워함에 대한 책망이 그 문맥이다. 즉 예수님은 율법이 폐하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옛 언약의 백성에게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에서 십일조를 요구하시고 말라기서에서 강조하신 것과 동일한 성격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율법과 연관된 십일조 평가에 따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복음 안으로만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요구되지 않았다. 율법을 요구하는 자체가 죄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시계추가 율법을 지나 복음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유대인 교사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물론 복음이 그 내용 상 율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수 있으며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이 외형적으로 율법의 어떤 내용과는 일치하게 된다.

십일조는 돌 성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율법으로서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이 뒤따랐을 것이다. 십일조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를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왠만큼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서신서 어디에도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은 없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 요청도 십일조를 요구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인데도 전혀 그런 내용이 없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기에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셨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기에 하여야 한다고 하면 안식일을 준수하셨기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만약 예수님께서 행하셨음에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된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잘못이다.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새벽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신 많은 행동들에 대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교회는 성경적인 원리를 토대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결정하여야 한다.

십일조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새벽 기도회 등을 함께 생각하면 어떤 원리의 일관성이 없다. 십일조는 예수님께서 지키셨고 지키라고 말씀하셨기에 유효하다고 한다. 안식일 준수는 예수님이 지키셨지만 지키라고 말씀하지는 않았기에 유효하지 않다고 한다. 새벽기도는 예수님이 행하셨고 행하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을 본받는 것으로서 유효하다고 한다. 이는 교회가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명백한 잘못이다.

안식일 준수에 있어서는 주일 성수로의 대체가 명백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 안식일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백성에게 안식일의 완성으로서 주일을 주셨다. 초대 교회가 안식 후 첫날, 매 주일 첫날에 공적 예배로 모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비록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따로 없더라도 언약의 점진성을 따라서 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것을 옳다. 안식일의 완성으로서의 주일과 그 날에 초대 교회가 공적으로 예배한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임이 분명하다.

그 당대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주일 성수는 아니었지만 주일을 지키는 것 자체는 사도적인 복음의 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십일조와 연결시켜 십일조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 같다.

그렇지만 아니다. 안식일의 완성으로서의 주일과 주일 성수가 명백한 것과 같이 십일조의 완성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기 위한 것이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자신이 아닌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사도들은 완성된 십일조를 교회에게 가르쳤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물질을 두 가지 용도로 나누어 말한다. 씨와 먹을 것이다(고후 9:10). 먹을 것은 가족들의 생활을 위하여 사용하는 물질이다. 씨는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어려운 지체들과 불신자들을 돕는데 사용하는 물질이다.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심어야 한다. 십분의 일이라거나 십분의 이 또는 삼이라는 등의 물질에 비례하는 어떤 기준은 없다.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을 씨로 받아들이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자원하여 즐거움으로 심는 것이 십일조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음을 말하면서 십일조는 교회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안식일의 완성으로서 주일과 주일 성수가 옳은 것과 같이 십일조의 완성으로서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가 옳은 것이다.

이는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면서 십일조가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의 잘못도 동시에 밝히고 있다. 십일조의 정신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소득의 얼마를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적정한 수준에서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어려운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는 기준을 정하여 하나님 나라를 구하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소득의 십분의 일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데 내어놓지 않는 신자라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십일조의 정신을 살려서 신자에게 물질 사용에 있어서 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전혀 잘못된 논리이다. 먼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보다 신자의 내면과 형편을 더 잘 아신다. 사람의 판단과는 비교되지 않게 정확하게 아신다. 그럼에도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에게 물질 사용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또한 신자들의 모습은 다양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소득의 십분의 일조차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신자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어떤 신자는 십일조를 하고서 그것을 만족하며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있다. 십분의 일 이상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여야 하는 경우에도 십일조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십일조를 하지 않고도 소득의 십분의 일을 훨씬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신자도 있다. 많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유럽 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사회 복지와 제 3세계를 돕는 일에 자신들의 소득을 사용하고 있다. 십일조를 하는 한국 교회의 신자들보다 훨씬 비율이 높다. 바나바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 것(행 4:37)도 동일한 원리이다.

만약 율법의 십일조가 옳다면 바나바가 땅을 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십일조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기업인 땅을 보존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희년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사도들로부터 듣고 바나바는 땅을 팔 수 있었다. 그 값 전부를 가난한 지체들을 위하여 기꺼이 즐겁게 내어놓을 수 있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모두를 내어놓은 것이다.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면서 십일조의 실제적인 사용은 십일조 제정의 목적과 전혀 다르게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다. 가난한 지체들과 불신자들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십일조의 정신 그 자체이다. 그런데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며 십일조를 하게하고서는 그와는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말로는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면서 행동으로서는 십일조의 정신을 저버리는 처사이다. 한국 교회는 십일조가 교회 재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경상비로 사용하고 있다. 구제나 선교를 위하여서는 전체 재정에 비해 너무도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십일조의 정신이 어떻게 헌금하도록 하는 방편으로만 이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폐하려고 오시지 않고 온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산상수훈은 십자가 이전에 주어진 말씀이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새 언약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은 탄생과 공생애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는 것이었다. 율법으로 흠이 없게 된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하셨다.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율법과 완성된 율법이 존재하게 된다. 율법과 완성된 율법은 분명히 다르다.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같은 언약 안에 있는 형제- 사랑이다. 완성된 율법의 대강령은 예수님 같이 하나님 사랑,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이다. 율법에서 십일조는 완성된 율법에서 물질이 씨와 먹을 것으로 구별되고 씨에 해당되는 물질을 의를 위하여 심어야 한다는 것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신약의 교회에게 아브라함의 십일조, 율법의 십일조, 공생애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은 죄악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도 강하게 거부한 다른 복음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신자는 그의 경고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말이다.  

박창진 5016park@paran.com



 

: